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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애도로서 닭 뼈 씻기

이상희 (문화인류학 박사과정)

치킨을 먹고 나서 남은 뼈는 치킨의 뼈일까, 닭의 뼈일까. 요리된 치킨을 먹을 때 ‘나’는 닭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지 않는다. 트럭 위에 이송되는 닭의 모습을 생각하지도, 도축장에서 털이 발가벗겨진 닭의 모습도 생각하지 않는다. 치킨의 뼈는 닭의 뼈이지만, 먹는 이가 생각하는 ‘그’ 치킨의 뼈는 이러한 의미에서 닭의 뼈가 아닌 치킨의 뼈다.

 

김아람 작가의 <치킨 다이어리>는 이 치킨의 뼈를 닭의 뼈로 만드는 작업이다. 십여 년 전, 비건이라는 말조차 익숙하지 않던 그때, 육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을 하던 작가는 치킨을 먹고 싶다는 욕망을 참을 수 없어 다시 치킨을 먹기 시작했다. 닭을 먹는 죄책감은 그녀가 먹고 남은 치킨의 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씻고 닦아 스스로에게 닭을 먹었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기록시키는 행동으로 변화한다. 하나하나 발라져 조각난 닭의 뼈는 집 한구석에 있는 자신의 상자 속에 모여 있다. 이 닭 뼈는 그녀의 수치심과 죄책감, 그리고 불협감 안에 쌓여 13년간 누구에게도 보여지지 않은 채 그 상자 안에 있었다.

 

<치킨 다이어리: To be bontinued…>의 전시장 입구, 닭 뼈를 가지고 한 조형 실험이 놓여 있다. 하나하나 따로 놓인 닭의 뼈들은 마치 고고학 유적지에서 발굴된 사료처럼 보인다. 그 맞은편에는 동물권에 관한 책들이, 또 그 맞은편에는 작가가 닭을 이해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들이 영상으로 지나간다. <꼬끼오 늘리기>(2022)와 <닭 되기(도시 꼬끼오)>(2023)에서 김아람은 닭의 소리를 이해하고, 따라 하기 위해 목소리를 갈고 닦는다. 또 다른 닭 되기 시리즈인 <닭 되기(아침 꼬끼오)>(2023)에서는 닭의 생태적인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닭 농장의 닭과 함께 닭 농장 닭처럼 일어난다. 불행하게도 닭이 ‘되지’ 못한 그녀를 지나가면, 작가가 모은 닭의 뼈들이 천장에 떠 있다. 그 맞은편, 김아람의 동료들이 물이 끓는 솥 주변에 둘러앉아 작가와 대담자가 준비한 인터뷰 스크립트를 차례대로 읽으며 동료와의 대화를 진행한다.

 

김아람 작가의 <치킨 다이어리>를 본 다음 날,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요즘 무엇을 하느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어제 전시를 갔다 왔다는 말을 전했다. 이 전시와 동료와의 대화를 어떻게 요약할지 모르겠던 나는 이 치킨이 닭의 뼈가 되는 과정을 전했다. “솥에 자신이 먹고 남은 치킨의 뼈를 끓여 이걸 직접 박박 씻고 흘러가는 작은 뼈들을 손으로 잡아 건조한 뒤 작은 상자에 담는 사람의 전시였어.” 덧붙이는 말에, 두 명의 친구가 눈썹을 위로 올리고 입을 모아 답했다. “엽기적이네.”

 

정신없는 결혼식장을 떠나 혼자 남겨졌을 때 불현듯 엽기적이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나 역시 그것을 엽기적이라고 느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렇지 않았다는 감상이 생경해서다. 이미 떠나간 닭, 심지어 본인의 식욕을 위해 죽여진 닭을 보내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진지하다. 솥에 뼈를 끓여 하나하나 이 뼈들을 씻어 모으는 이 일련의 과정과, 사육되는 닭과 같은 환경에 있기를 단편적으로라도 시도한 그녀의 십여 년은 엽기적이라기보단 애도의 과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애도가 그녀가 가담한 죽음에서 기인한다는 점은 이 애도의 불완전함을 동시에 선명히 드러낸다. 이 작업은 일면 동물을 사적인 이유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판단과 그것이 심적으로도 달갑지 않다는 마음이 ‘그저 먹고 싶다’는 욕망과 화합하지 못하여 생기는 불일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작가의 닭 뼈는 불온한 애도다. 이 애도의 의례는 죽은 것들의 혼을 위로하고 진정시키는 위령제와 유사하나, 동시에 그녀가 위로해야 할 영을 스스로 만들어 제를 올린다는 점에서 불온(不穩)하다. 동시에, 작가가 가담하고 있는 모든 일, 닭이 되는 것부터 뼈를 씻는 일은 닭이 생동한다는 것을 직시하는 일이자 생동하는 것의 소멸에 가담하고 이를 목격하는 일이며, 쓰레기장에서 폐기되어 마땅한 것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일이다. 살아 있는 닭이 스스로 온기를 만드는 존재일 때, 뼈는 자생적인 열을 잃고 오직 주변의 온도에 감응한다. 그녀가 뼈를 끓이는 행위는 잃어버린 온기를 되돌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영 그 온기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애도는 불온(不穩)하며 불온(不溫)하다.

 

하지만, 이 반복이 불온하기에 작가는 비로소 죽음을 몸으로 느낀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일생에 여러 번 일어나지만 죽음을 몸으로 느끼는 일은 매우 드물다. 작가의 작업은 그 둘이 분리되지 않는 자리에 있으며, 작가는 그 자리에 본인을 누이고 싶어 한다. 작가가 보여주는 모순성은 ‘죽이며 씻기기’라는 지점에도 있지만, 동시에 삶의 변혁을 그녀가 꿈꾸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과정은 이 죽음-제의를 몸에 밴 것으로, 동시에 여전히 변하지 않는 습(習)으로 가져가게 한다. 닭 뼈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생성된다. 이 모순의 닭 뼈는 여전히 작은 상자 안에, 그녀의 냉장고 안에, 그녀의 손과 피부 구멍, 머리에 남아 있다.

 

이는 비건으로의 전환을 유예한 결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와 불일치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이를 단순히 유예로 이름 짓기 어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욕망을 어찌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무엇이 ‘옳은지’는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유보이자 유예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이 작업이 단순한 유예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작가가 그 욕망을 지우거나 덮지 않고 끝까지 직시하기 때문이다. 이 직시는 인식의 차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몸이 먼저 움직이는 자리에서 시작한다.

 

이 작업은 의도적으로 담론적인 설득을 빗겨 이루어진다. 전시장 한편에 놓인 동물권 책들은 공장식 축산의 실태와 이것이 만들어내는 고통과 불공정함, 그리고 동물의 권리를 말한다. 김아람의 작업은 그 옆에 가까이 놓여 있으면서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작가가 하려는 것은 닭을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닭의 삶부터 죽음을 몸의 지식으로 통과하는 것이다.

 

한국의 무당과 같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통 치유사 샹고마(sangoma)가 되는 과정에는 thwasa라 불리는 입문의 시간이 있다. 이는 한국에서 흔히 ‘신병’으로 불리는 것과 같이 조상신(amadlozi)이 몸에 침투해 오는 병으로 시작한다. 샹고마는 설명할 수 없는 몸의 증상, 꿈과 혼란을 개념을 통해 정리하지 않는다. 오랜 수련을 통해, 혼란은 그들의 몸을 통과하고 이를 통해 화합하기 어려웠던 조상과의 관계를 체화한다. 이들에게 앎은 몸에 앞서지 않는다. 몸의 혼란이 먼저 오고, 수련을 거쳐, 비로소 이것들은 지식이 된다.

 

김아람이 처음 치킨을 다시 먹기 시작했을 때의 상태도 이와 다르지 않다. 먹으면 안 된다는 판단은 있었지만, 몸의 욕망은 정리되지 못했다. 그 불일치는 해소되지 않은 채 뼈를 씻는 행위, 닭의 소리를 흉내 내는 목소리, 부화등과 함께 일어나는 몸을 통해 반복되었다. 샹고마가 혼란을 살아냄으로써 그것을 체화하듯, 그녀는 불일치를 지우거나 봉합하지 않고 몸의 습으로 새겨간다. 이 <치킨 다이어리: To be bontinued…>의 동료와의 대화 중 여러 사람으로부터 이 작업이 ‘제의’ 같다고 언급된 것은 작가의 기괴한 뼈 끓이기 너머에 있는 이 반복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죽음은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몸에 통과되는 것이다.

 

이 작업은 들뢰즈와 가타리가(2011)가 말하는 동물-되기(becoming-animal)와 닮았다. 닭이 되려는 시도가 닭이 되는 것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듯, 이 되기는 출발점과 도착점 사이의 운동이 아니라 그 경계가 흔들리는 상태 자체를 가리킨다. 김아람이 닭의 소리를 흉내 내고 부화등에 몸을 맞추는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은 그러므로 이 작업의 한계가 아니다. 닭이 ‘되지 못하는’ 그 자리, 인간과 닭의 경계가 완전히 닫히지 않는 그 진동 속에서 작가의 시도가 머문다. ‘닭 되기를 할수록 닭이 될 수 없다는 것만을 알게 되었다’라는 작가의 소회는 이것이 처음에는 모방을 목표했더라도 종래에는 차이로 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닭의 소리를 흉내 내는 목소리는 닭의 소리가 되지 못하지만, 그 실패의 반복 속에서 출발했던 목소리로도 돌아오지 못한다. 진동이 반복될수록 출발했던 처음의 자리에서 멀어진다. 그것이 되기가 몸에 남기는 흔적이다.

 

그러나 작가의 여정에서 가장 급진적인 지점은 아직 물음으로 남아 있다. 이 ‘닭-되기’의 과정에서 괴물적인 결연은 작가와 닭 사이에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이질적인 것들이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접속한 이 여정은 인간을 만드는가, 닭을 만드는가. 어느 쪽도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창발할 수 있는가. 뼈를 씻는 손과 씻기는 뼈 사이에서, 닭처럼 깨어나는 몸과 그 몸이 흉내 내려 했던 닭 사이에서, 그 결연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의례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 자리에 이 작업이 있다.

 

이 의례는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반복 속에서 그것들은 조금씩 몸에 새겨지고, 그렇게 닭 뼈는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와 손, 그리고 피부에 남는다.

 

참고문헌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엮,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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