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된 재현에 저항한다
김화용 (작가, 기획자)
미술을 버리세요
청년 작가들이 청자로 있는 자리에 초대되어 본인의 작업과 활동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과 원동력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이미 저마다 작업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이들에게 감히 내가 무슨 조언을 할 수 있을까 당황했다. 게다가 본인은 미학적 성취를 이룬 작가라 하기 어렵고 되레 그런 기준을 흐트러트리며 계속 미끄러지던 이라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잠깐 아득했지만, 갑자기 내 입에서 튀어나왔던 말은 “미술을 버리세요. 미술과 계속
멀어지세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창작을 지속하는 방법을 묻는데 미술을 버리라니.게다가 자세한 설명 없이 다소 관념적인 말이라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무책임하게 ‘예술의 생존 불가능성’을 개탄하고 자조적으로 ‘탈미술’을 말한 건 아니었다. 예술 생산자이지만 동시에 시민이고 가족이며 공동체의 일원이기도 한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균형을 말하는 것이자, 버려야 채울 것이 생기는 순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는 창작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예술 안 세상에서 한 치도 나가지 못한 채 경계 너머를 포착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질문이다. 예술은 소외된 이들부터 비인간에 이르는 타자적 존재를 적극적으로 가시화해 왔다. 용기와 기지를 발휘한 예술은 여전히 헐거운 사회 안전망틈 앞에 서서 그 사이로 빠져나가는 존재를 끌어안았다. 이러한 예술 실천은 한국 현대사의 여러 국면에 자주 등장했다. 정권에 비판적인 예술을 억압하는 블랙리스트까지 등장했던 사회에서 예술이 실천적 역할을 해온 만큼, 파국적 상황을 재현하는 것에 관대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아량에 기대 타자를 작품에 손쉽게 가져오고 실천이라 손쉽게 정당화했던 것은 아닐까.
우회하는 말하기
특히 시각 예술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을 프레임 안에 남기고 수많은 현실을 프레임 밖으로 밀어낸다. 사건의 증언이거나 지워진 문제를 가시화하는 경우라도, 연루된 이들에게는 고통이나 공포같은 감정도 함께 딸려 온다. 시대적 책임이 발동되는 기록에도 어쩔 수 없이 배제되는 실재가 있으며, 또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상흔이 있다. 숙고 어린 장치가 필요한 이유다. 예를 들어 조심스러운 접촉, 우회하는 말하기, 에둘러 가는 과정은 재현 불가능한 것을 날카롭게 공략하지 않고 보듬으며 상상하게 한다. 이런 태도는 작품과 관객 사이의 안전거리를 만들고, 그 거리가 만든 공간에서 여운과 사유의 파장이 일어난다. 정동이 촉발되는 장소다. 이와 같은 시공간 속 작품은 관객의 몸을 경유해 해석의 가능성도 확장한다.
아방가르드는 도발적인 시도로 견고한 기존 규범을 허물었던 급진적 예술의 역사다. 이런 역사의 영향으로 간혹 타자를 재현하는 폭력적 방식이 전위적 예술로 혼동되곤 한다. 직접적이고 완결된 재현은 바깥까지 챙길 겨를이 없다. 심지어 스펙터클하고 자극적 방식으로까지 치닫는다. 게다가 초 고도화된 기술과 비인간의 문제가 대두되는 생태계 재앙의 시대에 이런 현상은 가속 페달을 밟는다. 뉴미디어는 시공간을 초현실로 압도하고 고통과 재난을 블록버스터화 한다. ‘타자의 현실’을 극강으로 재현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강하고 거대한 장면은 ‘관객의 현실’과 더 철저히 분리된다. 파국의 세계와 관객을 섬세하게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감을 자극하는 이미지로 재난을 소비하는 우를 범한다.
비인간을 재현하는 경우를 보자. 재현 대상이 되는 것을 넘어 스펙터클의 재료가 되고 실재의 존재가 전시장에 동원되기도 한다. 예술사 안에서 이런 논쟁적 상황은 이슈를 만들고 심지어 예술적 권위가 더해지기도 한다. 실험적 예술 표현으로 둔갑한 채 주목 경쟁 시장에서 레벨을 올리는 도구로 활용된 것이다. 인류세, 동물권, 기후정의 등 시대적으로 비인간 타자를 더 자주 호명하게 된 현재에 더 예민하게 점검해야 할 사안이다. 강력한 재현은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모두 누락한 채, 상황을
포착한 작가를 증명하기에 바빠진다. 다종적 정의를 말하면서 인간(작가)이 중심에 서 있는 풍경의 세계만을 재현하는 것은 다소 모순적이지 않은가. 어떤 예술도 파국의 낭떠러지에 매달린 존재를 직접 길어 올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재난의 세계를 발견한 ‘나’, 절멸 위기에 처한 존재가되어보는 ‘나’에만 머무르는 건 아닌지 돌아보자. 예술적 당위라 생각한 일이 폭력이 되고 애도와 실천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혐오와 차별이 되는 위험한 경계를 넘는다.
물성으로 다뤄지는 생(生)의 존재를 보며 ‘서벌턴은 말할 수 없다’는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이 문장만 읽으면 타자는 주체적 저항을 할 수 없다는 말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그가 말한 중요한 맥락은 하위주체가 ‘말할 수 없게 하는’ 권력 구조를 깨야 한다는 것에 있다. 그 구조 안에서는 그들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이는 여성과 소수자를 넘어 비인간에 적용해도 그렇다. 산업화 이후 공장식 지배-착취 시스템과 더 견고해진 인간중심주의는
비인간을 극도로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생태계 시스템이 붕괴에 직면한 지금, 결국 서벌턴은 말하고 있다. 전 인류를 공포에 떨게 만든 COVID-19는 생태계가 인간이라는 가해자에게 보낸 경고이며 위기에 몰린 피해자의 선언이다. 인간은 현재의 구조를 바꿔야 하는 요구를 받고 있다. 예술도 기존의 방식을 부숴야 한다.
김아람은 위기에 내몰려 안정적 정주가 어려운 비인간을 대면하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기록하려 비인간에게 다소 깊숙하게 다가간다. 당연히 그들의 상황을 완전히 알 수 없었던 김아람은 여전히 그들과의 거리와 재현 방식에 대해 재고하는 중이다. 이런 고민은 그에게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많은 예술 생산자는 미술 제도 내 아카데미에서 자랐고 계속 예술계의 자장안에 살면서 마치 중력처럼 익숙해진 경직된 예술 문법에 잠겨있다. 예술은 동시대 이슈와 매체까지
언제나 새롭게 등장하는 것을 기민하게 흡수해 작품에 적용했다. 하지만 가벽 너머와 프레임 바깥의 세계에서 삶의 태도와 언어까지 바꿔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아람의 머뭇거림의 시간을 응원한다. 판단중지-에포케(epoché)가 모두에게 필요한 순간이다.
미술 혐오로 바꿔 읽어 보자
‘인간중심주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던 것일까. 인류의 문화, 예술, 철학의 역사는 인간이 ‘만물 중 영묘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영장 靈長)’라는 사실을 증명하며 발전해 왔다. 비인간은 철저히 인간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비교항이 된 존재였다. 특히,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이 붕괴된이후 인간 개개인의 주체성을 중시하는 사고로 전환되면서 ‘개인’이라는 자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인간의 주체적 의지와 자유로운 상상에 대한 긍정은 근대 르네상스 예술을 꽃피우게 했고, 이는 현대
예술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 주체성에 대한 이 인식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거치며 점차 극단적인 인간중심주의로 변질되었고, 한없이 팽창되다 임계점을 지나 터지고 무너지고 있다. 다시 한번 세계관을 뒤집어야 하는 시기이고 새로운 시각으로 창작의 태도를 고민할 때다.
인간-개인을 중시하며 발전된 예술이 다시 ‘인간중심주의’가 만든 현재의 파국을 적극적으로 논하고 있다. 인간이 당연하다고 믿어온 관습을 점검하며 뼈 아픈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다만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술 및 예술가에 대한 정의와 문법 그리고 재현 방식은 관성 그대로라는 점이다. 이 글은 김아람의 작업에 대한 비평 글이라기보다는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작업을 살피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된 이 ‘관성’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김아람 작가의 개별 작업을 하나하나 논하기보다는, 결국 우리 모두가 지닌 어쩔 수 없는 인간중심적 관점과 그로 인한 불균형과 오류에 대해 함께 점검해 보기를 제안하고자 한다.
프랑스의 문학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는 다양한 악기 연주자이자 작곡가였고 소리로서 음악과 언어를 바라보며 독자적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그런데 작가는 본인의 뿌리이자 영혼인 음악(소리)을 극도로 증오하는 『음악 혐오』(1996)라는 책을 썼다. 그는 소리의 근원을 역사적으로 쫓으며, 음악의 본질은 불평등이고 청취와 복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관악기와 현악기 소리는 ‘생명을 죽이는’ 행위에서 시작되었다. 피리 소리는 새를 잡기 위해 유인하는 소리였고, 활시위의 떨리는 소리는 죽음의 노래였다. 귀에는 ‘귀꺼풀’이 없다. 듣는 것은 의식적으로 쉴 수 없고 수동적인 감각이다. 순종적인 귀를 겨냥해 극도의 공포를 조장한 사례를 역사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나치는 소리를 이용해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육체를 옥죄고 복종을 강화하는 데 이용했다.
본인은 이 책을 읽으며 해결되지 않던 체증이 해소되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음악을 미술로, 소리를 재현으로 바꾸어 읽어도 통하는 글이었다. 키냐르는 시각적 자극은 청각에 비해 주체적 선택이 가능하다 말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과도한 이미지의 범람 안에 빠져 있다. 수많은 디지털 콘텐츠와 숏폼(Short-form), AI가 생성한 폭력 이미지, 그리고 가상/증강현실 같은 고도화된 재현까지 통제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선 지 오래다. 음악마저 영상으로 감상하는 상황에서 가장 지배당한 감각은 시각일지도 모른다. ‘음악 혐오’라는 표현은 음악에 대해 무조건적 부정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서 있는기반에 대한 당연한 수용이 아니라 집요한 의심이다. 본질 위에 덧씌워진 헤게모니와 오용-악용-남용의 사례를 파악하고 껍질을 벗겨내야 오염되지 않은 근원을 탐색할 수 있다. 모순적이지만 음악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더 음악 바깥으로, 고요와 침묵 속으로 침잠해야 한다.
“소리가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기를 권한다”
“아무것도 듣지 말라”
“음악으로부터 멀어지라”
키냐르가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말을 인용해 적은 문장을, 주어를 바꿔 읽어 본다. 작가는 음악이 드문 것이었을 때 유혹적이지만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고, 음악이 끊임없이 흐르게 되자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어떻게 음악 바깥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미술 그리고 ‘재현된 시각물’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어쩌면 재현 홍수의 시대에 영영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호명했던 타자의 고통이 재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우회하고 에두르며 가야 했던 것처럼, 불가능한 것을 알지만 지속적으로 다가가는 과정에서 우린 어떤 파편과 파장을 만나게 될까. 재현의 강박과 멀어지자. 그것은 분명 놀라운 일일 것이다.
김화용은 이데올로기, 젠더 문법, 정상성, 인간중심주의 등 견고한 규범에 균열 내는 질문을 던져 온 미술작가이자 기획자이다. 협업, 만남, 워크숍, 퍼포먼스, 영상, 글, 액티비즘 등 여러 기획을 통해 비체, 타자와 타자성, 비인간 동물 등을 가시화하고 연결하는 실천적 작업을 시도해온 미술작가이자 기획자이다. 사회와 예술의 관계 및 공존을 고민하는 ‘옥인 콜렉티브’의 설립자이자 멤버로 활동했으며 전시 《몸이 선언이 될 때》 (보안1942 아트스페이스 보안 3, 서울, 2021), 공공예술 프로젝트 《제로의 예술》(광주, 서울, 온라인, 2020-21) 등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