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동물에 대해 작업하는가?
:‘개’를 중심 으로
김아람
1.동물과 인간, 그 사이의 모순
언젠가 먼 미래 나의 회고전 제목을 ‘사랑의 매’로 지어야겠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이 단어가 나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양가성과 모순을 담아낼 수 있는 상징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학생 시절, 선생님들이 회초리에 ‘사랑의 매’라고 적어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두려운 존재였는데, 실제로 나를 때렸고, 나는 아팠으며, 왜 이렇게까지 맞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납득되지 않는 순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경험은 내가 사랑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복잡성과 모순을 깨닫는 계기이기도 하다. 단순히 포용적이고 따뜻한 감정으로만 묘사되는 사랑은 폭력과 억압, 충고와 통제 같은 다른 측면들을 동반한다. 마치 인간이 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사랑이 통제와 지배의 이름으로 작동하듯 말이다. 그래서 ‘사랑의 매’를 맞은 경험은 나에게 인간과 동물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의 단초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이상이 아니라, 그 너머에 숨겨진 이중적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나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두를 ‘사랑’할 수는 없기에, 인간의 사랑은 일관되지 않은 양상을 보인다. 특히, 혐오받거나 기피되는 동물들—비둘기, 뉴트리아, 붉은 귀 거북 같은 존재들—은 그러한 모순적인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낸다. 특정 동물을 미워하거나 기피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합의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물들을 내가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미워하는 것을 다르게 보고, 동시에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다르게 바라보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경계 속에서 살아가는 듯 하지만, 인간과 동물이 맺는 복잡한 연결성을 누구보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작업을 통해 그 경계를 흔들고, 그 속에 숨어 있는 모순을 드러내고자 한다.
2. 동물, 인간, 그 관계의 출발점
내가, 또는 우리가 애정하는 동물, ‘개’를 떠올릴 때 인간과 동물 관계의 출발점을 찾게 된다. 처음에는 이를 인정하기 싫었고, 아니라고 생각했다. 과거 동물권 운동에 동참 할 때, 개를 좋아하는 것이 곧 동물을 좋아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물에 대한 고민을 하는 내가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사람이라는 위치로 읽히는 것이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어릴 적 나의 행동은 이런 꺼림칙함과 상관없이 개를 향한 무조건적인 연민에서 출발했다.
어렸을적 반려견이 이미 있음에도 길에 있는 유기견들을 집으로 데려와 전단지를 만들고, 주인을 찾아주거나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하는 일을 반복했다. 당시 친구들은 나를 길 위에 개들을 다 잡아간다며 ‘개장수’라 놀렸지만, 나는 개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연민은 때로는 더 큰 불편함을 초래했다. 길 위의 개를 수도 없이 데려오며, 이미 우리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반려견이 불편함을 느끼는 모습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이 모습을 보며 그때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에게 아빠는 “네가 뭔데 개의 운명을 바꾸려고 하느냐?”라는 말을 했다. 당시 나는 아빠를 매정하고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 말은 나에게 중요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내가 뭔데? 인간이 뭔데?
개의 운명을 바꾼다는 것, 혹은 인간이 동물의 삶과 죽음에 개입, 통제, 관여 등을 하는 것. 나는 개를 통해 동물, 자연, 그로 구성된 세상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3.개는 나에게 인간과 동물, 세상을 확대해서 보는 스크린과 같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나는 ‘동물권’이라는 단어조차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동물에게 ‘권리’라는 인간 중심적 개념을 부여하는 것은 언어와 소통을 공유하지 않는 존재에게 인간의 기준을 강제하는 행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동물권은 동물과 인간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동물을 우리와 더 멀리 떨어뜨리는 경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 안에서 동물의 존재를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본질적으로 모순적일 수 있다.
2024년 1월, 국내에서 개 식용 종식법이 국회 본 회의에서 통과된 소식이 있었다. 많은 사람은 이를 잔인한 기성 문화를 종결시키는 첫걸음으로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 이면에 개시장에 남겨진 개들의 삶을 떠올린다. 지금껏 열악한 사설 보호소와 개고기 뜰장의 개들은 무엇이 다른가? 특정 동물만을 구제 대상으로 삼는 인간 중심적 기준은,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묻게 한다. 개가 인간에게 친근한 동물이라는 정서적 이유는 법과 제도로 이어지며, 이러한 정서는 결국 특정 동물을 구제하거나 금지할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경계를 더 견고히 만들 뿐이다.
이러한 기준은 인간 중심적 정서에서 출발하지만, 그 기준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여러 복잡한 문제를 남긴다. 특별법 제정으로 개고기 산업이 향후 불법화 될 예정(「개 식용 종식 특별법」 2027년부터 개 식용을 위한 사육·도살·유통·판매 등이 법으로 금지된다.)인데, 자신의 생계를 위해 마리당 지원금을 얻으려는 개고기 사업자들이 사설 보호소의 개를 데려와 장부에 올리거나, 자신의 사업장을 사설 보호소로 전환해 음지에서 개고기 사업을 지속하려는 모습을 전해 들었다. 인간이 특정 동물을 선택적으로 구제하거나 보호하는 과정은 인간 사회의 감정적 위선과 윤리적 경계를 드러낸다. 개식용 종식법이 발의되고 시행되는 과정은 분명 중요한 진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법안이 다른 동물들—예를 들어 돼지나 닭 같은 가축—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가? 우리는 개를 보호하면서도 다른 동물의 생명은 침묵 속에서 소모되고 있음을 외면한다. 이처럼 인간 사회는 특정 동물에 대한 정서적 친밀감을 기준으로 보호의 경계를 나눈다.
나는 작업을 통해 이러한 경계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추는지 질문하고자 한다. 동물의 생명과 권리를 논의할 때, 우리는 정말로 그들의 존재를 이해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인간 자신의 윤리적 안락함을 강화하려는 것인가? 개를 보호한다는 법적 조치는 결국 인간이 설정한 선을 다시 한번 명확히 하며, 동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또 다른 방식으로 위계화한다. 그래서 나는 이 경계선을 주목하고,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데 초점을 둔다.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인간의 책임을 묻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동물을 어떻게 정의하고, 그 정의 속에서 인간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다시 생각해야 하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학부 시절, 나는 펫샵에 대한 비판 작업으로 교내 규정을 어기고 학교에 친구의 개를 몰래 데려온 적이 있다. 생명을 상품처럼 다루는 현실을 극단적,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싶었지만, 살아있는 개를 상자에 넣으려는 시도는 동물권이라는 개념을 스스로 배신한 행위로 이어졌다. 발표를 위해 사람들이 없을 때 저항하는 개의 머리를 억지로 상자에 밀어 넣고, 숨구멍을 뚫어 테이프로 봉했다. 당시에는 이를 작업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동물권'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이 경험은 나로 하여금 작업의 윤리적 경계와 예술적 태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 계기였다.
<개>, 2015, 학부 수업 발표 작업
더 나아가 활동가와 예술가로서의 태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했다. 활동가는 변화의 순간을 포착하고, 이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간다. 반면, 예술가는 그 순간을 느리게 붙잡아 두고, 그 이면의 맥락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다. 활동가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면, 예술가는 한 발 물러서서 그 움직임의 본질을 비추며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데 집중한다. 예술은 당장의 변화를 이끌기보다는 문제를 오래 머물게 하고, 그 안에 숨겨진 층위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또 다른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 관계를 지나치게 낭만화하거나 단순히 소비되는 이미지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특히, 동물을 예술 작업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단순히 극단적이거나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정당화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또한, 동물을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하더라도 단순히 '합법'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적 상상력이 만연하다는 점은,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전 나의 작업에서 비둘기를 포획하거나, 뉴트리아에게 카메라를 다는 ‘직접적인 행위’에 대해, 그것을 더 강화하지 않는 다음의 방법들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다.
동시에 동물을 예술적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그 복잡한 맥락과 현실을 왜곡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질문의 답에 질문을 낳아야 한다. 질문이 응답에 대한 공감이자 반발이고, 포용이자 거부이며, 사랑이자 폭력이 될 수 있기도 할까? 우선은 내 작업에서 답을 내리지 않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며,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다층적으로 탐구하는 데 그 의의를 두고자 한다. 확실하지 않은 나 자신의 시선조차도 또 하나의 시선, 또 하나의 질문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를 통해 모든 예술이 반드시 정치적 실천이 될 필요는 없지만, 나의 예술만큼은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을 통해 그 어떤 실천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가 인간으로서, 예술로서, 동물을 다루는 것이 기만이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김아람, 개, 2 채널 영상, 10‘51“, 2023
특히 작년에 유기견 보호소에 대한 영상 작업을하면서, 개를 소재로 다루는 일이 얼마나 복잡한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미워하는 동물들에 대한 작업은 "인간이 오해하고 있었어…"라는 관람자의 반응을 상대적으로 쉽게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개라는 동물은 인간의 믿음과 정서가 너무도 굳건하고 무거워 작업의 방향을 설정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다. 이로 인해 개에 대한 작업은 복잡성과 무게감을 동반하지만, 그만큼 더 큰 가치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아직 나는 이 과정을 통해 내가 더 깊은 내공을 쌓아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에게 개는 단순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탐구해야 할 중요한 작업적 축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4. 인간, 동물, 그 속에서의 나
나는 사랑의 매를 맞거나, 들거나, 혹은 멀리서 바라본 경험을 바탕으로, 삶 자체가 예술이 되는 순간을 원한다. 그리고 동시에 내 꿈이기도 한 소, 돼지, 닭과 함께 살다가 그들과 함께 나의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나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은, 내가 작업을 통해 던져온 질문들이 내 삶으로 이어지고,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돌아오는 순환의 과정일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생명을 살리고, 어떤 생명을 외면하는가?
내가 동물을 이해한다고 말할 때, 그 이해는 정말 동물의 입장에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나를, 인간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해에 불과한가?
동물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관점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재정의하려는 시도가 또 다른 형태의 지배로 귀결되지 않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은 나의 작업이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을 통한 그 어떤 실천은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답을 내릴 수 없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그것이 현재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힘이며, 나의 작업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탐구하며 모순과 복잡성을 끌어안고 나아갈 수 있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