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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와의 대화1(김아람, 김이중)

2026년 3월 21일 14:00- 공간 인공빛

〈동료와의 대화〉는 참여자들이 미리 작성된 대화 스크립트를 함께 읽으며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다. 참여자들은 돌아가며 김아람과 김이중의 대화를 번갈아 맡아 읽고, 치킨을 먹고 남은 뼈를 씻고 모아온 행위, 먹는 일과 애도, 죄책감과 불편함을 둘러싼 질문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통과시킨다.

치킨다이어리 동료와의대화 전경2(디졸브).jpg

사진: 양은경

중앙에 냄비를 두고 물을 끓인다. 사람들은 그 주위에 둘러서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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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주말에 인천 중에서도 1호선 인천의 끝. 동인천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이번 <닭 되기 퍼포먼스 시리즈>와 <치킨 다이어리>를 만들고 있는 김아람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질문을 통해 함께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이 자리엔 진행을 맡아주실 김이중님이 함께합니다. 저는 이중씨께 서로의 작업을 지켜보고 긴밀히 대화를 나누었던 동료의 입장으로 이번 기획과 대화에 참여해달라고 했는데요, 제가 제안드렸을 때 어떤 생각이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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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오늘 진행을 맡은 김이중입니다. 그동안 아람씨의 작업을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입장에서 의아한 점이 많았는데, 그 점을 솔직하게 나누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아람씨와의 문답을 통해, 아람씨의 작업 세계를 더욱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의 문답을 정리해 하나의 대본처럼 구성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아람과 이중이 되겠습니다. 대본을  차례로 읽으며, 과거 저희의 대화를 재현해보고자 합니다. 그렇게 아람 씨의 작업 세계를 함께 탐험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 공간을 운영하고 계신 양은경 작가님께서 공간 및 작업 설명을 해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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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공간 인공빛을 운영하는 양은경입니다. ‘인공빛 실험실’이라는 이름으로 작업을 완성시키는 공간이 아니라 쌓이는-실패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번 김아람 작가님의 <치킨 다이어리>를 통해 무언가가 되지 못한 채 바깥에 놓인 것들에 대해, 되지 못함에 의해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완료된 이미지, 전시가 아닌 방식을 선택한다면 무엇이 꺼내질 수 있을까? 라는 가능성을 보고 싶었어요. 해서, 아람 작가님께서는 이중님과의 토크를 제안해 주시고 🦴를 꺼낼 용기를 내어주셨어요. 🦴들을 여기 공간에 옮겨와서 펼쳐보고, 움직임에 대한 실험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고정되었습니다. 이미지가 아니라 소리로 들려주는 것을 떠올리면서 프레임과 모터를 만들었고, 그때부터 전혀 생각하지 않던 것들이 만들어졌어요. 그 안에서 정말 많은 시도를 했는데, 이 모습이 인간이 다시 닭🦴를 제어하고 있다는 느낌이 벗겨지지 않더라고요. 결국 모터를 멈추게 됐어요. 모두 예상하지 못하고 시작했고,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서, 언제든 0으로 돌아가는 가능성을 계속 상기했던 것 같아요. 꺼낼 수 없던 것을 억지로 꺼내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그 과정을 여기에서 시도해보는 것이 여기의 목표 였던것 같습니다. 또, 그 과정에서 왜 선택하지 않았는지가 가진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이 시점과 모습을 고정한 이 자리가 귀하게 느껴져요. 목격하러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 드립니다. 그 다음에 올-오지 못할 것들에 대해서 많이 나눠주세요. 그럼 이제 다시 동료와의 대화를 시작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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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을 먹고 난 뒤 그 🦴를 모으는 일을 2013년 부터 현재까지, 13년동안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모으는 일’과 ‘보관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로 이 자리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예전에 아람 씨께서 어린 시절 무언가를 수집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는데요, 어떤 이야기였는지 다시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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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 등굣길에 돌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냥 지나치질 못했어요. 그냥 혼자 덩그러니 이 도시에 있는게 안쓰럽기도 하고, 뭐 귀엽기도하고, 그래서 그 돌을 발로 차면서 학교까지 데려가고 사물함에 넣어놨다가 하교할 때 다시 꺼내서 집까지 차고 가고, 그렇게 한동안 돌이랑 같이 등교를 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그 행동이 끝났는데, 제가 그때 가지고 있던 하트 상자에 그 돌을 넣고 “안녕..”이라고 적어서 보관했던 기억이 나요. 수집이라기보다는 뭔가 같이 시간을 보냈다는 느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 밖에도 잘라진 오이를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제일 좋아하던 또 다른 하트 상자에 물을 넣고 오이를 담가 냉장고에 넣어둔 적도 있고… 아마 그렇게 하면 다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비슷하게 눈사람을 만들면 작은 식구들을 만들어서 냉동실에 넣어두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뭘 모은다기보다는 사라질 것 같은 것들을 그냥 두지 못했던 것 같아요. 끝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조금 더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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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을 냉동실에 보관했다는 이야기가 신선하네요. 귀엽기도 합니다. 머리카락이나 손톱, 이를 모으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저 또한 한때 발톱을 모으곤 했는데, 몸에서 떨어져 나갔음에도 여전히 나의 일부라는 감각 때문에 그것을 쉽게 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아람 씨가 오이나 눈사람을 냉장고에 보관했던 것도 그것들을 자신의 일부처럼 여겼기 때문 아닐까요? 닭 🦴를 모으는 행위 역시 '나'라는 범위가 확장되면서, 무언가를 그냥 버리는 일이 가벼운 상실처럼 느껴져 시작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 마음이 지금의 수집으로 이어진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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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을 거부하는 마음이 없다고는 못하겠네요. 오이나 눈사람을 냉동실에 넣어두던 것도, 뭔가 끝나는 걸 그냥 두지 못했던 조바심?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근데 저는 거기에 항상 “내가 뭔가 해볼 수 있다”는 믿음도 같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다른 이야기 일 수도 있지만 어렸을때 동네에서 버려진 강아지나 고양이, 토끼를 자꾸 집에 데려오던 것도 비슷했어요. 그땐 도시에 유기동물이 눈에 띌 정도로 많았거든요. 근데 당시 이미 저희 집에 같이 사는 강아지가 있었는데도 또 데려오고, 그러니까 아버지가 초등학교 5학년인 저에게 “네가 뭔데 길 위의 동물들 운명을 바꾸려고 하느냐”는 말을 하셨어요. “네가 뭔데?” 전 그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그때는 엄청 충격받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이 저를 관통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상실을 막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동시에 내가 뭔가를 구할 수 있고, 바꿀 수 있고, 개입할 수 있다는 믿음? 어쩌면 인간 중심적인 우월감도 발견할 수 있는게 아닐까요… 연민이나 동정이 항상 좋은 감정만이 아니고, 위계를 전제로 할 수 있다는 걸 알게되면서 더 그부분을 곱씹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닭🦴를 씻는 일도 내가 무엇을 안타까워 하고 있는지, 그래서 내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과정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저의 모순들을 보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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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으로 닭 🦴를 씻고 모으다 보니 어느덧 꽤 많은 시간이 쌓였네요. 닭을 먹고, 🦴를 씻어 보관하기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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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 치킨집에서 먹은 🦴를 집에 가져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그날그날 바로 씻었는데, 양이 점점 늘어나면서 냉장고에 넣어두게 되고, 그게 또 쌓이면서 결국 냉동실로 가게 됐던 것 같아요. 그러다 냉동실 문이 잘 안 닫힐 것 같을 때쯤 될때 씻게됩니다. 중간에 페스코(육류와 가금류를 먹지 않는 채식)를 했을 때는 치킨집 사장님께 부탁드려서 일주일에 한번씩 통째로 가져와 그날 가게에 배출된 100리터 쓰레기 봉지를 분리해 🦴를 모으기도 했고요. 이후 다시 치킨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먹은 🦴는 다시 냉동실에 모아두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씻는 과정은 보통 하루?8-9시간 정도 걸립니다. 먼저 두 시간 정도 삶고 불순물을 제거한 뒤, 다시 1-2 시간 정도 더 끓입니다. 그러면 살과 🦴가 거의 분리되는데, 그때 물이 비교적 맑아지고 🦴만 남는 상태가 됩니다. 그 시점에서 칫솔로 하나씩 닦고, 다시 한 시간 정도 끓인 뒤 채에 걸러 같은 과정을 반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식초를 넣고 한 시간 정도 더 끓이는데, 이건 제가 평소 텀블러를 식초로 세척하던 습관이 이어진 것 같아요. 다 씻은 🦴는 채에 물기를 뺀 뒤 신문지 위에 수건을 깔고, 겹치지 않게 눕혀서 말립니다. 보통 일주일? 정도 두면 제가 이만큼 이면 된다!하는 정도로 마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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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를 씻는 번거로움과 비린내를 오랫동안 감수해 오셨군요. 이제는 닭의 살을 마주할 때의 감각이 예전과는 사뭇 다를 것 같습니다. 13년 전과 지금, 어떤 변화를 느끼시나요? 저 역시 갈수록 가벼워지는 '소비'라는 행위를 경계하고자 모든 지출에 11가지 기준을 적용해 점수를 매기는 작업을 6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돈을 쓸 때마다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멈칫하는 감각'이 생겨났지요. 아람 씨에게도 이 꾸준함을 통해 새롭게 깨어난 감각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 작업의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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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비린내를 감수했다”는 표현은 저한테는 좀 과장처럼 들려요. 뭔가 대단한 결단을 오래 지속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말 같아서요. 이중 씨도 알다시피 저는 닭을 맛있게 먹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먹어놓고 감수했다고 말하는 게 약간 짜쳐서... 거부감이 생겨요. 그렇다고 이게 연출된 고민은 아니거든요. 저는 불편한데, 그렇다고 안 먹고 싶지는 않아요. 오히려 먹을 때 그 불편함이 더 커지고, 더 충돌하고, 더 거대해지는 느낌이 있어요. 근데 이런 말을 하면 할수록 이상해져요. 그냥 안 먹으면 되잖아요? 닭의 살, 🦴을 마주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사실 단순합니다. “아, 나는 그럼에도 또 먹는구나. 또 먹고 싶어하는구나. 이들을 먹길 바라는구나.” 그걸 13년 동안 반복해서 확인해온 것 같아요. 그 모순이 사라지지 않아서, 그래서 이 작업을 계속하는 것 같아요. 완전히 끊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감각해지지도 못하는 상태. 아마 그 애매한 지점이 이상하게도 이 작업을 계속하게 만드는 동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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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되지 않은 애매한 불편함이 작업을 지속하는 원동력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불편함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버려야 할 부정한 것들이 나의 가장 사적인 공간에 쌓여 있다는 사실이 그 축을 이룰 듯합니다. 현대인은 자신이 생산한 오물을 외부 시스템을 통해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데 익숙하기에, 그것을 어떻게 버려야 할지 깊이 고민하지 않곤 하죠. 예술가는 그 효율적인 시스템에 안주하며 무책임하게 동조하기보다,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고민하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저 또한 먹은 것을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원룸 베란다에 한 달간 배설물을 모아 퇴비화한 뒤 제가 먹은 채소의 생산지에 뿌린 적이 있습니다. 무척 불편한 과정이었지만, 그만큼 생태적 책임과 연결됨을 절감했지요. 그런 의미에서 생활 공간에 쌓여가는 🦴들을 마주할 때, 그 '불편한 존재감'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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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방 안에 쌓인 🦴들을 마주할 때 내가 먹은 것이 끝나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실제 닭이었던 존재든, 버려진 🦴든 간에요. 그리고 내가 닭과 맺은 관계가 음식물 쓰레기로 바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연장하는것? 그게 저의 일종의 기획인 셈이고 동시에 제가 느끼는 불편함, 모순을 자가 생성하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통해 닭🦴를 씻는 행위는 생산, 소비, 그리고 “폐기”라는 세 영역을 같이 볼 수 있겠습니다. 폐기는 우리가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고, 어딘가로 이동해 모이고, 묻히고, 태워지지만 결국 어떤 잔재로 남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닭🦴는 폐기의 문제를 굉장히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물질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먹고 바로 버리고 잊고 다시 소비하지만, 저는 그 🦴를 남겨두면서 소비가 끝났다고 여겨지는 순간을 끝나지 않게 만드는 쪽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건 닭🦴를 모은다기보다, 사라지지 않는 어떤 것을 제 공간 안에 두고 계속 마주하려는 시도일 수도 있겠네요. 사람들은 보통 썩고 냄새나는 것들을 집 밖으로 최대한 빨리 내보내려고 하잖아요. 저는 그걸 제 생활 공간 안에 남겨두면서, 소비와 폐기가 동시에 벌어지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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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엔 아람씨의 영상작업 '꼬끼오 늘리기', '도시 꼬끼오', '아침 꼬끼오'를 상영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들은 닭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과학적 관찰이 아니라, 스스로 닭이 되어보는 '되기'를 통해 닭과의 연결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 역시 1년 동안 거리의 보도블록 하나를 매일 닦고 뽀뽀하며 '돌 되기'를 했던 적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신기한 감각을 마주했습니다. 이처럼 대상이 되기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아람 씨가 중요하게 여기는 예술적 태도나 가치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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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보지 않고도, 다른 방식으로도 만남을 상상해보는 것이 저한테는 중요한 태도인 것 같습니다. 도시에서는 살아 있는 닭을 거의 볼 수 없는건 이미 자명한 사실이잖아요. 불가능한 만남을 상상하는 것 자체는 예술? 상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그런 측면에서 닭의 소리를 모사하고 그 소리를 내기 위해 제 몸을 계속 훈련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만남의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럴 수록 우리의 경계가 더 강화되기도 합니다. 그럼 닭되기의 과정은 동시에 만남의 어긋남으로도 경험하게 되네요. 이미 먹은 닭의 🦴를 씻으며 그들과 만난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유사한 맥락입니다. 그건 닭의 죽음에 이미 동참한 행위이지만, 동시에 폐기 이후의 만남을 통해 또 다른 닭의 존재와 나를 대면하게 만들어보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렇다면 저한테 ‘되기’는 닭과 인간 사이에 있는 거리나 간극을 제 몸으로 계속 확인해보는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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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다이어리에서 아람 씨는 닭 다리 살의 '충격적인 맛있음'을 언급하며 순살 치킨의 편리함과 🦴 있는 치킨의 수집 행위 사이에서 갈등하셨죠. 맛은 중요합니다. 의학적으로도 미각의 상실은 즐거움의 부재를 넘어 사망 위험을 40~60% 이상 높이는 중대한 생존 지표라고 합니다. 닭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미각을 상실하진 않겠지만요. 저는 동물 먹기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맛이 그립지도 않습니다. 특이한 경우지요. 아람씨도 페스코를 하시다가 그만두고 닭을 먹습니다. 안 먹으면 해결되는 문제가 많은데, 아람 씨는 왜 계속 닭을 먹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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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기 싫지만 아무리 이 대답을 피해 보려고 해도 ‘맛’입니다. 맛은… 무시 못해요. 뭐 맥주가 생각날때 떠오르는 습관일 수도 있고,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음식의 기억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랑 치킨을 먹던 어떤 시간들의 분위기일 수도 있고요. 닭을 먹는 행위에는 맛뿐 아니라 그런 문화적인 기억이나 일상의 리듬도 같이 묶여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닭을 먹지 않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점점 닭을 먹는 사람의 자리에 더 솔직한 이야기들을 풀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안 하면 되는 일인데 굳이 먹으면서 생기는 불편함이, 저에게는 어떤 모순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상태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근데…. 제가 비건이 되면 답을 찾게 될까요? 정말 이 상황에 대한 애매한 불편함이 해소될 수 있을까요? 굉장히 조심스럽지만… 맛과 불편함, 욕망과 모순이 같이 있다는 걸 계속 확인하는 일, 아마 이 생각이.. 이 작업을 계속하게 만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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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들은 바로는 아람 씨는 저처럼 비거니즘이나 동물권 운동 같은 선명한 윤리적 결론에 도달하려 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오히려 닭을 계속 먹으며 그 흔적을 집요하게 모으는, 어찌 보면 모순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요. 명쾌한 해답을 택하는 대신, 언뜻 기괴해 보이는 수행을 지속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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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제가 그 만큼의 그릇이 못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일부러 기괴한 방향을 만드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솔직하고 싶어서? 그런데 솔직하게 까놓고 말하니 사람이 기괴해져요. 언젠가 부터 저는 닭🦴를 씻으며 저만 느낄 수 있는 닭을 만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삶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들에게 무언가 전복당한다는 느낌이 들 때 기묘한 짜릿함을 느끼거든요. 어디까지 그 이름없는, 소리없다고 느끼는 동물들이 나의 삶에 침투할 수 있는지를... 더 느끼고 듣고 스스로에게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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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 씨는 닭 🦴를 개별적으로 구분해 명명하기보다, 커다란 솥에 한데 모아 삶는 방식을 택하셨지요. 이 광경은 개별성이 소멸된 '집단 매장지'의 공포를 환기하는 동시에, 쌓인 🦴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려는 서늘한 느낌을 줍니다. 한편으로는 거대한 솥을 젓는 마녀의 주술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이러한 방식이 관객들에게 어떻게  보이길 바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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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애매한 불편함이 여기에 숨을 수 있겠네요. 애매한 불편함이라는게, 어떤 치밀하지 않는 방식과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치밀하지 못한 것을 숨기려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서요. 주술이라고 스스로 생각해본적은 없지만, 닭들을 만난다라는 기분을 느낀다고 치킨 다이어리에 썼다는건… 저에게 어떤 의식처럼 의미화 되고 있긴 합니다. 어떻게 보이는지는… 대화가 끝나고 여기계신 분들이 말씀해주시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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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를 삶은 뒤 씻어낼 때 ‘맨손'과 '칫솔'만을 고집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고무장갑조차 허용하지 않는 그 직접적인 접촉'이 아람씨께 왜 그토록 중요한가요? 저 역시 보도블록에 뽀뽀하며 신체적 접촉이 언어 너머의 많은 것들을 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를 만지고 씻어내며 물에 쪼글쪼글해진 아람 씨의 손끝에는 어떤 감각들이 머물다 가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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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치약, 식초, 세제, 락스 등 집안에서 표백하거나 세척하는 제품들로 닭🦴를 씻는데에 적극적으로 실험을 했어요. 그런데 결국에 제가 다 씻어 냈다고 느끼는 것은 하루종일 🦴를 삶고, 또 삶아서, 다시 씻고  ‘마음에 들때까지’ 계속 씻기는거에요. 닭에게 제가 물리적인 시간을 최대한 쓸 수 있을때 까지 써야 마음이 놓여요. 왜그럴까요? 불편하게 먹고 모으기로 해놓았으면서 몇 달간 냉동고에 방치해두는 것에 대한 죄책감? 닭🦴 씻기의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하였으나 계속 이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의지? ... 가끔은 스스로 자학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이 과정에서 제가 어떤 방편을 써서 완전히 편한 방식을 택하는게 닭에게 있어 너무 치사하게 보인다고 할까요? 제 나름의 예의일 수도 있겠네요. 

닭🦴를 세척하면 한 냄비?정도의 양은 보통 8-9시간 걸립니다. 더 걸릴때도 있고요. 손에 물이 마를 시간이 없어요. 과정을 끝내고 나면 두 손이 창백해질정도로 지쳐보여요. 닭의 죽음이 제 손으로 전이 된 것처럼 시체의 손으로 보이고, 제 손이지만 서늘하다고 할까요. 잠깐 수십명의 닭의 영혼이 제 손을 가득 침투하고, 그들이 나의 살아 있는 상태를 먹는? 혹은 나의 살아 있는 상태를 잠깐 빌리는? 그런 느낌도 들어요. 손 뿐만이 아니라, 닭🦴를 씻으면 집이 자욱해지는데, 연기도 연기지만 그 습한 느낌이 말로 설명을 못할때가 있어요. 특히 냄새… 비린내라기보다 닭냄새…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그 습도와 찜찜함으로 온전히 느끼는 묘한 분위기… 이런 것들을 통해 나의 집에서 닭과 만난다는 생각을 연결하게 되는데, 이걸 의도한건 아니지만 이런식으로 계속하다보니 저와 닭의 만남을 점점 발견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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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전에 페스코 채식 기간 동안 치킨집에서 버려진 🦴 포대를 가져와 세척했던 일화를 들려주셨는데요. 남이 먹고 남은 🦴도 세척하다가 결국 '내가 먹은 것만 씻는 것이 맞다'는 결론에 도달하셨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타인이 배출한 🦴를 닦는 행위는 왜 아람 씨에게 연결감이 아닌 허무함을 안겨주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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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먹은 것만 씻는다”는 건 계속 하다 보니 생성된 저의 기준?에 가까워요. 우리에게 닭이 식재료로 놓여 있고 음식으로 소비되는 구조는 같지만, 그 중에서 제가 집어 들고 씹고 삼킨 닭은 저랑 직접적으로 얽힌 사건이잖아요. 추상적으로 생각되는 산업 구조가 아닌, 제 몸을 통과한 일이고, 제가 관통시킨 관계이고, 사건이에요. 그래서 제가 먹은 걸 씻어야만 제 모순을 말할 수 있다고 느꼈어요. 남이 먹은 걸 대신 씻으면 저는 조금 편해진다고 생각해요. 구조만을 비판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고, 책임에서 한 발 물러날 수 있으니까요. 근데 저는 그 안전한 자리에는 있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최소한 제가 먹은 것만큼은 저한테로 다시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먹은건 제가 씻는게 타인들에게 모순이 될 수 있지만, 사실은 저에게 가장 말이 되는 이야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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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개인적 이유를 넘어서 구조에 관한 질문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대한민국은 치킨공화국이라 말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닭을 먹는데 닭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는 어떻게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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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닭을 국민 음식이라고 말하지만, 그 ‘국민’이 누구를 말하는지 저는 사실 잘 대표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한 마리에 2–3만원 하는 치킨을 정말 모두가 국민 음식처럼 먹을 수 있을까요? 저한테는 이게 굉장히 개인적인 기억이랑도 연결되어 있어요. 한때 유복했던 저희 집이 아버지 사업으로 갑자기 와장창 무너진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저랑 동생이 치킨이 먹고 싶다고 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그때 가지고 있던 거의 전 재산을 털어서 동네에서 아주 오래된 기름 냄새가 나는 옛날 통닭 한 마리를 사오셨어요. 종이 포장지가 기름으로 다 투명해질 정도로요. 저는 사실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버지 말로는 좋은 프랜차이즈 치킨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 그걸 사왔는데, 저희가 그걸 너무 순식간에, 손가락을 쪽쪽 빨며 먹는 걸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치킨공화국’ (국내 프랜차이즈 치킨 가맹점 3만개 돌파, 2025년 12월 기준) 이라는 말이 어떤 면에서는 되게 많은 걸 가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 같이 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인류세에서 말하는 ‘인류’가 누구냐는 질문이 있는 것처럼, 치킨을 먹는 ‘국민’도 균질하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요. 반면에 닭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그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요. 축산업에 공모하는 여러 방식들이 있고, 뭐 예를 들어 도축 노동(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분들이 담당하고 있는 현실)이라든지, 채식을 선택하기 어려운 군대나 학교 급식 같은 조건들도 있고요. 그래서 저는 치킨을 둘러싼 구조를 ‘많이 먹는다’는 문제로 보면서도, 누가 먹고, 누가 먹지 못하며… 또 누가 그 노동을 담당하고, 그래서 어떻게 이 소비가 가능해지는지까지 같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내용을 머지않아 저의 치킨 다이어리가 함께 해볼 수 있다고 믿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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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 씨의 작업 과정을 보면, 닭의 삶을 반추하는 시간보다 🦴를 깨끗이 씻고 수집하는 행위 자체에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쏟으시는 듯합니다. 어쩌면 한 생명으로서의 닭보다 '🦴'라는 물성에 대한 집착, 혹은 이를 완벽히 수집해야 한다는 강박이 작업을 지속하는 주된 동력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아람씨의 내면에서 '닭이라는 생명을 환기하는 일'과 '닭 🦴라는 물성을 수집하는 행위'는 각각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며, 이 둘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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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를 얼마나 깨끗하게 씻을지, 어떻게 말리고 보관할지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걸 느껴요. 그래서 혹시 이게 닭이 아니라 🦴라는 물성에 대한 집착이고, 작업으로서의 강박이 더 큰 동력인 건 아닐까, 스스로 당연히 의심하고 있고요. (사실 어떤날은 뭐 그냥 그럼안되나? 싶은날도 있고요. 그러다가도 누군가의 죽음을 빌려 제 욕망을 성취하면서… 그걸 절대 인정하지 않을까봐 싶어 그것도 두렵습니다. 두렵다에는 저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겠지요. 아무튼) 최근 저의 강아지의 죽음으로 반려동물 화장터에 갔었어요. 내 강아지의 🦴 조각을 보면서, 그게 당연히 그냥 어떤 칼슘 덩어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느껴는데요. 그걸 곱씹어보면서 동시에 닭🦴가 저한테 완전히 물질로만 느껴지는 걸까도 같이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닭🦴도 저한테는 완전히 사물로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다만 그 관계의 밀도는 다르겠죠. 이름을 알고, 시간을 함께 보낸 존재와의 관계와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금은…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게 저한테 중요해진 것 같아요. 그래서 이 행위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나는 나대로 이것을 왜 계속 할 수 있는지를… 근데 이렇게 닭🦴를 씻으며 닭을 만난다는 경험을 느낀다고 했는데, 과연 그 이후는 무엇이 되는걸까? 다른 변화를 만들어 볼 수 있을까? 이 닭🦴 씻기가 일종의 의례라면, 의례로서의 기능이 무엇일까? 어쩌면 그 기능이 아직 없기에 나는 죄책감의 매몰 되고 있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합니다. 어쩌면 저는 여전히 닭을 충분히 떠올리지 못하고 있고, 그 빈자리를 🦴를 씻는 행위로 메우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요…… 치킨다이어리가.. 저희의 대화로 인해 어떤 길에 접어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갈길이 더 멀어 보입니다. 저의 더 많은 삶의 시간을 이 일에 써야 할 것 같네요.

작업 중 ‘닭 되기’ 연작은 닭의 울음소리를 잘 내기 위한 훈련을 지속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경계를 두들기며, 그 한계 지점에서 일어나는 미끄러짐을 솔직하게 대면하려는 듯합니다. 저도 돌-되기를 하면서 수없이 실패를 겪었는데요. 닭 되기 작업과 🦴를 모으는 것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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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과 인간의 경계가 얼마나 단단한지 개겨볼려하는 것? 처음에는 <치킨다이어리>랑 <닭 되기 시리즈>가 좀 다른 결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는 죽은 이후의 남아있는 것을 다루는 일이고, 하나는 살아 있는 닭의 소리를 흉내 내는 일이니까, 방향이 반대처럼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근데 계속 하다 보니까, 오히려 같은?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닭 되기를 하면서 아무리 연습해도 저는 닭이 될 수 없잖아요. 목을 써보고, 나름 어떤 호흡, 소리내는 방법을 바꿔보고해도 결국은 인간의 성대로 내는 소리고, 인간의 몸이에요. 그 실패?가 계속 드러나요. (여기서 성공이 무엇이길래 저는 이걸 실패라고 말하는걸까요? 아무튼) 이중씨의 말씀처럼 닭과 인간의 경계가 더 강화되죠. 치킨다이어리도 비슷해요. 🦴를 씻는다고 해서 제가 닭의 삶을 복원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이 더 강화되는... 근데 닿을 수 없음, 그 자명해진 경계를 저는 계속 버티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둘 다 닭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만지작거리는 작업에 더 가깝네요. 그게 피할 수 없는 사실이자 비극이고, 그렇기에 이 작업들이 또 희극이 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네요. 

치킨다이어리에서 아람 씨는 자신을 '닭을 그냥 소비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일반 소비자가 식욕을 위해 닭을 도구화한다면, 아람 씨는 전시를 위해 그 잔해를 도구화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지점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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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조심스럽지만 ‘도구화’라는 단어를 우리가 때론 너무 평평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소비자가 식욕을 위해 닭을 도구화한다고 할 때, 그 도구화는 대개 닭의 죽음을 투명하게 통과시키잖아요. 먹는 순간에 그 생명은 기억되지 않고, 구조 조차도 문제 되지 않아요. 이것은 도구화 그자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치킨다이어리는 그 도구화를 숨기지 않는 행위, 오히려 그 과정을 반복해서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고 말해 볼..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의 대화에서 도구화가 문제라면, 문제는 도구화 자체인가요, 아니면 그것이 은폐되는 방식일까요? 이미 제가 소비한 닭을 ‘작업’을 위해 뭔가를.. 정당화하고 싶진 않습니다. 또한 제가 이 작업을 한다는 사실이 뭔가 윤리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둔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저는 여전히 먹는 사람이고, 소비 구조 안에 있습니다. 다만 저는 그 구조를 통과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고 싶지 않았다는 점을 좀 더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닭을 먹고 🦴를 씻는 행위는 닭을 도구화하는 동시에, 저 자신을 생산-소비에 더불어 폐기의 과정을 함께하며 이 구조의 증거로 남기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닭 🦴를 씻으면서, 동시에 저의 모순과 공모를 노출합니다. 그렇다면 이 작업은 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을 포함한 구조 전체를 불편하게 만드는 행위에 가깝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를 씻는 행위는 분명 잔해를 다루는 것이고, 도구화입니다. 하지만 그 도구화를 통해 닭만이 대상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저 자신 또한 함께 드러나고, 함께 노출되고, 도구화?에 사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일 두려운게 ‘이런 고뇌를 하며 닭을 먹고 🦴를 씻는 “나”’로 수렴되는 것인데… 지금 딱 그런 모양새일까요? 아무튼) 또 한편으로는 구조를 드러낸다고 하지만, 그래서 “치킨 다이어리에 김아람이 만나는 닭은 어디에 있나요?”를 생각해보면, 분명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중씨가 제게 이 작업은 굉장히 취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예술인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진작 이 취약함을 해결했었을 거라고 말했던게 떠오르는데, 그렇다면 저에겐 답을 찾지 않는게 답이 되는걸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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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람 씨는 이 활동이 “🦴를 씻는 나”로 수렴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하셨는데요. 지금까지 말씀을 들어봤을 때 왜 그곳으로 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만약 “🦴를 씻는 나”의 모습이 전면에 선다면 그때는 이 작업의 양상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해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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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한 성형외과에서 안면윤곽이나 사각턱 수술로 깎아낸 환자들의 턱🦴를… 60cm 정도 되는 유리관에 꽉꽉 담아 만든 ‘턱🦴탑’을 그 병원 로비에 전시한 사례가 있었어요. 아마 저도 그 장면처럼, 🦴가 계속 쌓이고 어떤 시각적인 충격을 만드는 방식으로 무언가 만들었겠죠? 🦴가 재료가 되고, 조형물이 되고, 기념비가 되는 순간들… 지금 이번 움직임의 실험도 그런 모습을 띄고 있는건 아닐지 많이 무섭고 두려웠어요. 닭🦴 씻기가 이미 그 자체로 작업인데, 이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뭔가 있어보이고 싶..어서? 전형적인 예술의 매체 형식을 아무 비판없이 답습하게 되는것… 동시에 저와 닭🦴의 관계와 시간성이 사라진다는 모종의 두려움 때문에, 전면으로 나서고 싶어도 못나서게 되었던 시간이 많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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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단정을 유보한 채 ‘보류’의 상태를 지속하는 일은 지난한 과정입니다. 더 깊이 나아갈 수 있음에도 주저하고, 명확한 전략 없이 회피와 긴장 사이의 불쾌함을 유지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확실한 결단을 내리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일 텐데요. 아람 씨는 어떻게 이 상시적인 긴장 상태를 끝까지 가져갈 수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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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없으니까… 그냥 한다.. 그럴땐 일단 그냥하는게 맞다. 대신 과장되지 않도록 그냥.. 한다… 모르겠을때는 일단 그냥 한다… 이런 답변만 생각나는데요. 이런 것들이 제 태도를 만들었다고 설명해 볼 수 있겠는데, 전략의 부재함을 끌고가는 이유라던가 어떤 불쾌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것은 타자가 저를 보며 만들어 낼 수 있는 해석의 영역인것 같습니다. 왜 이걸 하는지에 대해서는 헤멜수도 있으나, 그만둔다거나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그렇게까지 의식하진 않았던것 같고 그냥 하니까 이까지 온게 커요. 무언가 명확해진게 있었다면 모순적이게도 지금까지 절대 할 수 없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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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인 🦴들을 꺼내 타인에게 온전히 보여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셨지요. 아람 씨에게 오늘 이 자리는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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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하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인데요. 또한 저 혼자 이 무더기를 다 꺼내볼 용기도 없고, 한편으로 마음의 짐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걸 다 꺼내서 아무리 (안전하다고 생각하는)동료들 앞이라도 이렇쿵 저렇쿵 설명하는게, 더 이상 제가 숨을 자리가 없다는 생각?이 제겐 소중하다고 느껴집니다. 제일 말하기 싫었지만, 제일 말해보고 싶은 것을 결국 말하는 그런 경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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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가 아람 씨에게 어떤 변곡점이 될지 기대됩니다. 전시를 마친 뒤, 앞으로 구상하고 계신 계획이나 새롭게 나아가고 싶은 방향이 있다면 공유해 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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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치킨다이어리를 오랜 시간 공들여 글로 맺어 출판하는 것이고, 바램은 영어로 써서 출판하고, 한국에 역번역되어 역수입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닭 🦴와 어딘가에 동행하고 나서는 일에 대해서 더 고민할 듯해요. 이번 인공빛 공간에서 이중씨, 은경 작가님, 그리고 설치를 함께 해주신 장시재, 윤대원 작가님 닭 🦴 움직임 실험때문에 정말 진짜 진짜 개고생 하셨어요ㅜㅜ 그런데도 닭 🦴 (모터)설치를 결국 토크 전날 가동하지 않는 것으로 최종 결정했지만, 동시에 닭 🦴를 전면으로 내세운 이번 기회에 제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방식으로서 이들을 등장시키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저와 닭🦴의 미래를 잘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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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관객들이 전시와 대담에 참여한 뒤, 훗날 식탁에서 마주할 수도 있는 닭의 🦴를 보며 어떤 것을 느끼게 될까요? 혹은 어떤 걸 느끼길 바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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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먹고야 만다를 스스로 알려주는 게 뭘까를 생각해보게 되는데요.

치킨 다이어리의 마지막 사진이 떠오릅니다. To be bontinued….💔🦴
 

참여자들 소감, 추가질문 나누기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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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질문1. 치킨다이어리에는 애도라는 표현을 쓰셨는데요, 이름도 없이 소비된 닭들에게 과연 '애도'가 가능할까요? 애도는 상실에 슬픔을 기억하고, 환대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생을 다한 이에게 말 거는 거라고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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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을 예전에는 가능하다고, 가능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 같아요. 근데 최근에는 애도가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단정하게 하게 됐어요. 얼마 전에 제가 돌보던 강아지가 하늘나라로 갔다고 했잖아요. 처음으로 반려동물 화장터에 가서 그 전 과정을 다 봤어요. 30키로의 몸이 불구덩이에 들어가고, 두 시간이 지나니까 큰 🦴 조각들로 나와요. 너무 낯설었어요. 거짓말 같았고, 이게 정말 내 강아지의 것인가 싶었어요. 그 🦴들을 보면서도 저는 제 강아지의 몸을 잘 상상할 수가 없었어요. 불구덩이에 넣는 순간에 당장 꺼내오고 싶고, 그냥 다시 한번 안아보고 싶고, 이제 진짜 죽음으로 넘어가는 건가… 싶었는데, 그 이후에 시간이 지나면서 애도라는 건 시끄럽고 정신없는 슬픔이 지나간 아주 고요한 거더라고요. 슬픔이 지나가고 일상에 익숙해지지만 그럼에도 기억하며 애정하고 떠올리는거요.  근데 제 강아지 🦴를 보면 이렇게 마음이 찢어지는데, 닭🦴를 볼 때의 순간과 너무 다르더라고요. 우리 강아지는 16살에 시한부 판정을 받고,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 속에서 잠을 자다가 떠났어요. 그런데도 제가 그렇게 슬펀던 이유는 맺어온 관계 때문이겠죠.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닭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죽는 과정을 자세히 본 적이 없고, 어쩌면 보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미디어를 통해 보았음에도 또 까먹어버리니까…) 내가 이들을 먹고, 씻고, 그 이후 애도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다시 말하면 제가 이런게 애도일까를 고민하고 비교해보니, 닭🦴 씻기는 애도가 아니게 되버린거죠. 인정해보자면 애도는 그게 닭에게, 그리고 저에게 어떤 의미를 다시 부여하려는 시도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만약 이름 없는 닭들이 살아 있는 몸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제가 직접 보았다면, 저는 아마 채식을 실패하더라도 한동안은 또 먹지 못했을거에요. 🦴를 씻는 것도 무의미 하다고 생각했겠죠. 찜찜함, 애매한 불편함을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것을 애도라고 부르고 싶었던 행위에 더 가까웠던 건 아닐까, 나도 왜 이걸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니 애도라는 의미에 좀 비빌수 있나 하는… 어쩌면 직접 닭을 키우고 죽이고 먹고 씻는것, 그게 진짜 만남과 애도가 될 수 있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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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질문2. 여담이지만, 이번 전시 준비를 돕던 중 봉투 속에서 번식한 권연벌레들을 발견하고 아람 씨가 크게 놀라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옆에서 아람씨가 당황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미 처리를 완료한 🦴에, 예기치 못한 ‘다른 생명’이 움텄다는 사실 때문이 었을까요? 무엇이 아람 씨를 놀라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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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간 닭🦴를 모으면서 벌레가 생긴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재작년 새집으로 이사 갔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저는 집에서 벌레가 나오면 웬만하면 죽이지 않고 밖으로 보내주는 편인데, 아무리 내보내도 계속 나타나고 출처를 모르겠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알고보니 닭🦴를 담아놓은 봉지 안에서 권연벌레가 엄청난 대번식하고 있더라고요. 심지어 닭🦴에 구멍도 많이 나있어요. 권연벌레는 사람을 물거나 해치지는 않지만, 곡물이나 저장된 음식 같은 걸 먹는 해충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모은 닭🦴를 먹고 이 벌레들이 생겨난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게 또 다른 닭의 연장 같은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그리고 계속 집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들이 끊임없이 드러나는 상황 자체가 좀 섬뜩했어요. 마치 제가 모아둔 🦴가 다른 방식으로 계속 살아 움직이는 것 같고, 어떤 식으로든 “여기 있다”는 걸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닭🦴를 세척하면서 원룸을 가득채운 공기와 습기, 냄새 덕에 닭과 만난다는 것을 처음 느꼈던 그 충격과 비슷했어요.  🦴가 멈춰진 상태가 아니라, 다른 생명으로 다시 나타나는 느낌이어서… 좀 무섭기도 하고, 소름 돋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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